Dome of the rock
서기 630년경 이슬람이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지방을 정복했을 때, 칼리프 Abd al-Malik은 ‘Dome of the rock(아라비아식 이름으로 ’Harm Al_Sharif)’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석조공들과 기능공들을 불러들였다(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슬람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692년 완공된 이 건물은 건물 중심에 거대한 바위를 놓고 둘러싸고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선지자 모하메드는 그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부분에 바로 이 모리아 산의 정상부에서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유대인들은 이 장소를 천지창조의 상징적인 토대,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인 이삭을 묶은 돌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이곳은 예수의 일대기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유대민족, 기독교인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 모두가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다. 사산왕조에서 쓰였던 방식으로 장식된 이 비잔틴 왕국 양식의 건물은 4개의 진입구를 지니고 있었다. 돔의 지름은 약 20m에 달했고, pillar와 column의 이중 시스템으로 구성된 약 20m 높이의 원통이 이 돔을 지탱한다. 중심부 원통은 원형이며 외각 부의 원통은 팔각형 모양으로 되어있다. piers와 columns로 구성된 2개의 고리는 서로에 대하여 마주 보고 있는데, 안쪽 고리의 4개의 피어서는 바깥쪽 팔각형 모양 고리에 있는 아치와 마주하고 있고, 이에 따라 사각형과 원형 간에 상호 작용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도록 한다. 돔과 원통은 벽돌이나 석재가 아니라 목재로 만들어졌다. 돔은 금색 구리 합금판으로 도금되었으며, 원통은 파랑, 빨강, 초록, 그리고 회색 등의 희미하게 빛나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내부 공간은 비잔틴 방식을 따라 모자이크로, 그리고 하단부는 대리석 베니어로 장식되었다. 이 건물은 엄밀하게 모스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건물은 기하학적 구조를 지닌 낙원의 상징이자 숭배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였으며 메카의 중앙 신전인 카바 신전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출입은 통제된 채 순회만이 가능한 카바 신전과 달리 이 건물은 출입이 자유롭다. 다만 신전 가운데에 있는 바위 가 있는 건물의 중심부는 출입이 통제되어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바위가 아닌 산의 정상부를 응시하기 때문에,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은 마치 건물이 이 정상부 주변의 공간으로 그 자신을 매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건물이 놓인 대지의 역사는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땅의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신전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 후 서기 70년경 해드려 황제의 로마군은 이 이스라엘의 신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위에 제우스 신전을 지었다. 혹자는 현재 Dome of the rock의 팔각형 구조의 근원을 바로 이 제우스 신전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정식적인 고고학적 판명이 나오지는 않았다. 십자군 전쟁 시 한 때 이 건물은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군이 물러난 뒤 이 건물은 다시 이슬람 신전으로 사용되었다.
우마이야 모스크
아랍 민족은 원래 문자를 쓰지 않았지만, 그들의 계속된 정복은 그들이 다른 문명과 계속 접촉하게 했고, 마치 그리스와 로마의 관계처럼 그들 또한 다른 문명을 서서히 받아들였다(다만 문명의 전파는 급격하거나 성급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 인도의 발달한 수학 체계를 받아들였고, 페르시아의 건축 기술과 비잔틴의 아치 기술,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석조기술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런 타 문명을 배우는 데 있어 가장 중심이 되었던 도시는 바로 Al-Ma NUR에 의해 건설된 다마스쿠스였다(그는 이 도시를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로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아랍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바그다드는 궁전과 정원, 모스크 등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리스어, 비잔틴어, 인도어로 번역되는 서적들과 아라비안 학자들의 학문 작업에 의해 급격히 늘어나는 책들을 감당하기 위해 칼리프 Al-Maun은 도서관을 건축하도록 명했다. ‘지혜의 집’이라고 알려진 이 건물은 알렉산더 도서관 이후로 가장 큰 지식의 보고가 되었다.
다른 도시들에도 도서관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 후 아랍 지식인들은 의약과 화학으로부터 광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다루었다. 서기 807년, HARun ar-Rashid 술탄은 샤를마뉴 대제에게 놋쇠 공과 기마병이 움직이는 놋쇠 시계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도, 만들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다마스쿠스의 또 다른 기념비적 이슬람 건물인 Umayyad 모스크는 이전 아랍인들이 모시던 Hadad 신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신전의 서쪽 면에 제우스 신전을 지었었다(이 건물은 4세기경 교회로 쓰이기도 했다). 서기 661년 이슬람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뒤 첫 번째 우마이야 칼리프의 치세 초기에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과 교회 건물을 함께 공유했다. 이후 칼리프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이 공간을 인수하기로 최종 협상한 대신 그는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안전을 보장했고 또한 기독교인들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 것을 허가했다.
다마스쿠스는 정방형 평면으로, 그리스에서 영향을 받아 가로수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은 주요 건물들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포함해서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모스크의 평면은 가로 156m 세로 97m의 넓이를 지닌 직사각형 형태로 도시에서 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북쪽, 동쪽, 그리고 서쪽 측면에 있다. 세 개의 홀이 이 모스크의 윤곽을 구성하는데, 이 홀들은 qibla 벽과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뻗어있다 그들은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된 두 개의 기둥 열에 의해 지탱된다. 좀 더 작은 두 번째 기둥 열은 육중한 목조 보를 받치고 있었으며, 이 기둥 열을 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거대하고 고전미를 지닌 아치였다. 미흐랍이 놓인 장소는 높이가 36m에 달하는 팔각형 모양의 NIS 돔에 의해 중심부에서의 그 위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모스크의 동쪽에는 대리석 구조체와 riwaq의 기둥들이 사도 바울의 묘를 지탱하고 있다(사도 바울은 이슬람교에서는 Yahya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건물은 많은 패널과 모자이크가 갖춰져 있었다. 8세기 초, Al-Walid bin Abd al-Malik 칼리프는 다마스쿠스 시민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다마스쿠스인들이여, 그대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만드는 4가지 요소들이 있다: 이 땅의 기후, 물, 과일, 그리고 그대들의 욕조로, 이에 나는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바로 이 모스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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