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건축물
동남아시아-인도 지역에는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건축물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자바섬과 캄보디아인들은 일찍이 벽돌과 같은 가공된 돌을 이용하는 건축 기술을 받아들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가능한 한 강을 따라 하류로 운반된 화산석들을 가공한 뒤 강변에 있는 건물 부지로 바로 가져가서 사용했다. 다른 장소에서는 사암이 많이 쓰였는데, 사암의 경우 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뗏목을 통해 채석장으로부터 건물 부지까지 운반되었다. 보로부두르에서 쓰인 돌들은 높이는 22cm로 동일했으나 깊이와 넓이는 불규칙했다. 이런 형태의 돌은 최대한 많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건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때 외부 표면의 돌들을 수직으로 결합하는 데 있어서 모르타르는 전혀 쓰이지 않았고 반턱쪽매 이음과 같은 건축 기술이 사용되었다. 나머지 돌들은 그 뒤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쓰였는데, 이 돌들은 보통 불규칙한 형태였고, 외부 표면과 달리 이들의 결합은 특별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보로부두르에 있는 두꺼운 두께의(two-stone-thick) 독립 관문과 같이 돌들의 두께가 일정해야 하는 구조물에는, 돌들을 서로 잇는 방법으로 돌과 돌 사이의 석재 장부촉을 쐐기 모양으로 만들었다. 갤러리 측 바닥에는 견치석들이 반턱쪽매 이음의 틈으로 몰림으로써 돌들은 서로를 압박하여 더욱 단단하게 조여졌다.
본토에서 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화산섬에는 안산암, 현무암, 응회암, 석회암 등 화산석이 주로 사용되었다. 벽돌쌓기 공법이 주로 쓰였는데, 이는 특히 간소하거나 기념비적 의미를 가진 건물에 주로 쓰였다. 홍초 또한 건축 재료로써 많이 쓰였는데,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쓰였다. 동남아시아 인들은 홍초를 자르고 굳히는 가공 과정을 통해 만든 블록을 건축 재료로 사용하였다. 홍초는 일반적인 석재와 달리 바위들이 산화 혹은 침식된 뒤에야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대 지방에서 흔히 일어났기 때문에 이쪽 지역에서는 홍초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벽돌과 홍초가 자주 쓰인 것처럼, 그들은 또한 Vajra-leap이라 불리는 치장 벽토 또한 치장대로 많이 사용하였다. Vajra-leap은 보통 외부 표면은 정교한 패턴으로 장식했고, 내부 공간을 장식하는 데는 마른 프레스코와 함께 사용되었다. Vajra-leap은 또한 건물의 석조 부분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노벨 아치는 지붕을 덮는 용도로 선택되는 아치였다. (인도 지방의 Mahavodhi 신전 등에서 발견되는 ‘진짜’ 아치는 미얀마 지방에서 한 세기 뒤에서야 주로 사용되었다)
이슬람교의 융성
7세기 무렵, 아라비아는 극단적인 온도와 지역적 성격 때문에 여러 강력한 문명국들의 주변부에 머무는 데 그쳤다. 이 땅에서 주로 살고 있던 유목민족은 베두인족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상으로 일하거나 불모지를 개척하며 지내는 민족이었다. 유대민족 또한 기독교인들과 아랍 민족들과 함께 시리아 지방을 위시한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아라비아 종교는 주로 자연과 천체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바로 메카였다. 모하메드는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일신교를 주장했다. 이는 기존 아랍 부족들의 정책과 다신교에 상반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아랍 민족들을 대상으로 격렬한 투쟁을 장기적으로 지속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결국에 모하메드는 메카를 점령해서 이 장소를 이슬람교의 지성소로 만들었다(모든 성인 무슬림들은 그의 생애에 있어 반드시 한 번 이상 메카를 방문해야 한다). 모하메드는 단순히 이슬람의 선지자를 넘어 넓은 시야를 가진 지도자였고 훌륭한 정치적 중재자였으며 동시에 천재적인 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종교와 정치가 융합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이는 훗날의 이슬람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서기 711년, 무슬림 군대는 동쪽으로는 인도 지방을,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지방을 점령했고. 9세기 말에 이르러 이슬람은 동쪽의 중국과 더불어서 가장 큰 문명 공동체가 되었다.
모하메드가 그의 정식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 거대한 영토를 누가 다스리느냐를 둘러싸고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결과 거대한 이슬람 문명은 아바스 왕조와 우마이야 왕조로 갈리게 되었다(이 관계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모하메드의 삼촌 알-아바스의 후손인 아바스 왕조는 그들 칼리프의 권위를 세우는 데에 종교적인 권위를 이용했다. 시아파 신도들 또한 8세기 무렵 아바스 왕조에 합류했는데, 시아파에서 또한 칼리프는 신에 의해 지명되어 종교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마이야 왕조 또한 그들 자신을 이슬람 국가의 후계자로 생각한 것은 같으나, 그들은 칼리프를 공동체의 보호와 현세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법적인 존재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바스 왕조와 달랐다. 이렇게 통치자의 지위가 종교적인 권위에서 나오는지 세속적인 데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갈등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초반에는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우마이야조가 더욱 유리한 고지를 취하고 있었다. 유능한 지도자들 덕분에 그들은 비록 길지는 않지만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동안 지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슬람 왕조가 통일되었던 유일한 시기이다. 이슬람교의 제의에는 따로 건물이나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5가지 계율 혹은 ‘pillars’를 지켜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루에 5번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마단 또한 중요한 계율이었는데, 이 기간에 무슬림들은 그들끼리 성찬을 나누고, 신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금식해야 하며, 필요한 자에게 기부하는 것을 통해 3번째 pillar를 만족시켜야 했다.
가장 일반적인 모스크의 형태는 신도들이 그들의 손과 머리, 그리고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우물이나 분수를 가진 마당이었다. 이슬람 초창기의 가장 일반적인 예배당은 기둥들이 죽 늘어선 공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데, 신도들은 이 기둥 열을 따라 qibla 벽을 마주했다(qibla wall : 메카 방향으로 그려진 선의 직각 방향으로 서 있는 벽). 성직자인 이맘(imam)은 이 qibla 벽의 중심에 서 있는 미흐랍 앞에 서서 예배를 인도했다. 또 다른 모스크에서는 미흐랍 바로 앞이 다른 곳보다 좀 더 높았고 돔으로 된 지붕으로 덮여있었다. 미흐랍의 오른편에는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min bar라는 연단이 있었는데 금요일에 이곳에 서서 설교하곤 했다. 대부분의 모스크에는 미나렛이 있었는데, 미나렛은 신도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다만 미나렛이 정확히 어디에 있어야 하고 또 몇 개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다.
이란의 북쪽 지방 Damghan에 있는 Tarik Khan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모스크는 담으로 둘러싸인 정방형의 마당과 기도 홀로 구성되어 있는데, 터널 볼트의 회랑을 약 2m 지름의 육중한 벽돌 기둥이 지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Aka 모스크는 qibla wall을 두드러지게 해주는 트랜셉트(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와 축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카이로에 있는 El-Hakim 모스크보다도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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